파타피직(Pataphysic)과 비인간전회(non-human turn )

최재원


...파타피직은 이처럼 놀이의 완전함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파타피직은 모든 것으로부터 결국 아주 적은 것을 갖는 작은 의미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모든 격식을 차린 무가치들과 모든 무가치의 조형은 파타피직 안에서 좌초되고 그리고 우부(Ubu)의 고르곤의 눈앞에서 돌이 되어 버린다. 파타피직 안에서 모든 사물은 인공적이며 유독하며 그리고 장미빛의 장식용 천사. 그것의 극단들이 볼록한 거울에 하나가 되는 것을 통하여 정신분열의 상태로 이끈다....로욜라(Loyola)-세상은 몰락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파타피직스Pataphysics


파타피직을 파타피직의 언어로 기술한 장 보드리야르의 <파타피직스 Pataphysics>에 나오듯 “...우리는 가상의 방귀 상태와 다르지 않다...방귀는 세상의 끝이며 그리고 모든 가능함의 세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홍장오 작가는 매우 겸손하게 그의 이전 작업들에서 다루어져왔던 우주와 외계인의 알레고리들이 자신의 부족한 어떤 완성도로 인해 관객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작업 세계는 현실과 가상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중첩되어 있거나 어지럽게 섞여있는 일종의 파타피지컬한 세계(pataphysical world)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국가주의적이고 메타피직스Mataphysics의 엄숙한 해석기계들은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며 홍장오 작가의 UFO를 허황된 망상, 동화적 환상으로 치부했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현실의 인물과 가상의 존재들이 동일한 존재론적 층위에서 존재하는 파타피지컬한 상황에서 “...세상은 하나의 우쭐한 페스트 종양, 의미없는 수음, 가짜 금으로부터의 망상 그리고 종이 찰흙이다. 그러나 아르또(Artaud)는 이렇게 여전히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아무것도 없음에서 그리고 또 없음에서 흔들려진 자지가 어느날 진짜의 정자를 사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를, 어떤 과잉된 존재로부터 잔혹극이 소생하지 않을까를, 즉 하나의 실제의 독성을, 이에 반해 파타피직은 어느 한 번도 섹스와 연극을 믿지 않았다.”<Jean Baudrillard, Pataphysics>


<Cosmic Life>(2014), <Welcome Space Brothers!>(2014), <Lucy In Black>(2013), <nowhere>(2012), <Blackout>(2010)등 홍장오 작가의 최근 십여년 동안의 개인전 타이틀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는 존재하지 않는 백과사전Encyclopaedia이나 외계의 목록을 만들고 진짜라고 짐짓 진지한 태도를 취하면서 은유와 현실이 동일한 층위의 시간과 장소에서 뒤섞이는데 나는 처음부터 그의 작업들이 파타포(Pataphor), 파타피직스(Pataphysics)일 것이라는 걸 간파했다. 하지만 파타포의 비애란 “...이러한 모든 잔혹의 무대, 실제(Reality)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Jean Baudrillard, Pataphysics>


전시를 앞두고 가진 작가와의 전시 기획단계에서 나는 ‘미확인비행존재’는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가 아닌OOO(Object Oriented Ontology)로 전회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작가의 설명은 미확인비행물체에 대한 재현과 상징으로의 메타포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 이번 전시를 통해 ‘은유(metaphor)’ 대신에 ‘파타포(pataphor)’를, 인간중심주의적 (Anthropocene) 관념에 끊임없이 포획당하는 대상으로서의 UFO (Unidentified Flying Object)를 비인간-전회(non-human turn)로 제안했다. 홍장오 작가는 다른 인터뷰에서 “저는 UFO나 외계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때문에 이 전시는 다가올 미래나 외계인에 대한 전시가 아니라 정확히 우리의 일상과 ‘현재’를 다루고 있습니다.”라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처음에 그의 작업에 매료되었던 것은 UFO나 외계인이 바로 지금 여기를 가리키면서도 의도에 의한 미적인 구성이 아닌 동시에 예술 제도에서의 전시라는 짓거리에 대한 파타포적 오해로의 유발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는 지나치게 진지했거나(메타피지컬한 ‚이해‘로의 욕망?), 조금은 무거운 블랙코메디(“쉬십시오, 쉬십시오, 부디정신이여”_에른스트 카씨러 Ernst Cassirer)로부터 결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파타피직을 위하여 모든 현상은 절대적으로 기체형태이다. 이러한 인지조차도 방귀와 가려움의 의식조차도 의미없는 성교도 어떤 경우에도 진지하지 않으며...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인식, 등등, 목적 없이, 영혼 없이, 말없이 그리고 스스로의 상상으로 그럼에도 불가피한 이것이 파타피직적인 파라독스의 꾸밈없는 작렬이다.” <Jean Baudrillard, Pataphysics>


‘은유(metaphor)’ 대신에 ‘파타포(pataphor)’라는 것은 가상과 현실의 중첩인데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시인이었던 알프레드 자리Alfred Jarry는 “가상성으로 기술되는 대상의 속성들을 그것들의 용모(lineament)와 상징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으로 파타피직스 Pataphysics를 ‘상상적 해결의 과학(the science of imaginary solution)’으로 보았다. 이는 전시 큐레이팅 실천과 직접적인 부분이었다. 화이트큐브는, 창문이 없는 벽으로 시간, 계절, 주변상황을 차단한다. 관객들은 훨씬 쉽고 빠르게 공간이 가지고 있는 목적과 기능에 적응된다. 이렇게 창문 밖의 세상을 인식할 수 없을 때, 화이트 큐브는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공간이 되버리며 지금 이 작품과 행위가 유일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는데 작가는 화이트큐브라는 관념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에 있어 건축공간 조성은 건축과 사물이 평평한 지형학으로 만나 출렁일 수 있도록 구성되는 것이어야 함을 의식하고자 했다. 전시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조성되었기는 하지만 그것들의 용모와 상징적으로 조화하고 출렁이는 세계로의 구성은 미흡했다. 작가는 파타피직을 예감했지만 그것을 전시의 포지셔닝으로 취했는지는 모호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작가의 발화가, 그의 예감과 물질들로 일으켜지는 전시건축 안에서의 사물들과 물질의 정동들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벗어나야 할 것은 작업의 물질계 자체가 아니라 그의 언어론적 전회linguistic turn였다.


인간중심주의적(Anthropocene)관념에 끊임없이 포획당하는 대상으로서의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를 비인간-전회(non-human turn)로 제안한다는 것은 화이트 큐브에 오브제나 설치 작품이 가진 배경을 결여하는 ‘대상화’로부터 얽히고 짜여지는 사물성으로 –거기에는 인간에 의한 감상을 위해 친절하게 놓여지는–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건 작가가 인간의 의도라는 인과적 사슬로 만드는 것이 아닌, 예측 불가능한 x,y축의 기계적 전회를 통해 산출되는 입체 도형 그래픽 이미지 작업에서 예감하는 즉 “예상하거나 의도된 것이 아닌 제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낯설은 형태들이 주는 이 정서”에서 예감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작가는 그것을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풍경일수도 있고 새로운 정서를 갖고 있는 공간일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브루노 라투르 Bruno Latour는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서구인은 비인간/인간, 객체/주체, 자연/문화의 이원론을 신봉해왔지만,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비인간이 결합된 수많은 하이브리드 또는 이질적 연결망을 아무 성찰이나 규제 없이 양산하는 모순을 저질렀다고 하며 바로 이것이 오늘날 지구적 생태위기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생태위기의 해결을 위해서는 비인간=객체 vs. 인간=주체로 보지 않고 모든 존재들의 행위성( agency)을 인정하는 비근대적 차원의 존재론을 통해 하이브리드들에게 적절한 존재론적 위치를 부여해주는 해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홍장오 작가에게 비인간 전회와 비인간 행위성 (non-human agency)을 말하는 것은 곧 ‘행위성’의 능력(즉 전시라는 사회세계를 생산하는 행위들)은

인간 행위자를 넘어서 비인간과 무생물에게까지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작가라는 인간들만의 역량을 의미했던 ‘행위성’대신에, 한 어셈블리지 안의 모든 상이한 물질성들이 다른 어셈블리지들에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는 역량을 지닌다고 간주하는 것이다.(Deleuze, 1988) 한 어셈블리지 안의 정동들이 나타내는 집합적 ‘경제’(Clough, 2004)는 그 어셈블리지(및 그것을 구성하는 인간 및 비인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이렇게 행위하고 상호작용하거나 느끼는 역량들은 관계의 내재적이거나 본질적인 속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며, 관계들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창발된다(Barad, 2001 ; DeLanda, 2006). 어떤 관계(그것이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생물이든 비생물이든)가 지닌 역량의 폭은 그것이 행하는 정동적 상호작용들의 풍부함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다.


홍장오 작가는《우주 정경 Cosmic Scenery》전시를 계기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저에게 있어서는 우주는 무지의 공간이고 여전히 저한테는 관념적인 대상이거든요 실질적인 대상이라기 보다는 무지의 대상으로서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물리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것들을 시각화했을 때 반응은 어떨 수 있을까.”고 말했다. 그의 작업들은 인식론(그러한 사물들을 어떻게 관찰자가 알 수 있는가)과 관념론(세계는 인간 구성의 산물이라고 간주하는)과 구별되는 존재론(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종류에 대한 관심)과 물질이 무엇이냐 그리고 물질이 무얼 행하느냐에 대한 사회학적 가정들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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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scura' shows obscurity but moths know bird's tears.

박우진 (옵스큐라)


낙엽과 잔가지가 뒤섞인 땅을 밟는 걸음걸음에 따라붙는 소리, 동시에 발끝에 전해지는 뭉근하면서도 딱딱한 촉감, 새·곤충·보이지 않는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이 내는 크고 작은 소리, 스치는 바람, 빛과 그림자의 교차로 일렁이는 깊고 깊은 숲.


홍장오의 이번 작업은 미지의 숲, 잘 알려지지 않은(in our obscurity)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보는 듯하다. 본래 숲은 객관적인 사실(fact)로 채워진 곳이다. 그런데 모든 사실을 명확하게 알지 못함(無知)으로 인해 숲은 인간에게 낯섦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장소가 되었다. 이것으로부터 이야기(허구, fiction)는 생산된다. 홍장오의 숲 역시도 이런 이중적 상황으로서의 사실과 이야기의 충돌이 나타나고 있다. 그의 숲은 투명하고 반짝이면서도 가볍고 묵직한 것의 조합으로 재현된다. 유리들이 부드럽게 부딪치는 소리, 일렁이는 빛의 반사, 스치고 피해가며 나아가는 걸음 속에서 우리는 잠자는 새의 머리에 앉아 새의 눈물을 마시는 나방을 만난다. 인공적으로 재현되고 상상으로 찬 허구의 공간에서 저 새와 나방 그리고 그들의 행위는 유일한 사실이다. 가장 사실 같지 않은 것을 사실로 밝힘으로써 공간의 낯섦은 증대된다. 주관적 상상으로 (어쩌면 무지함으로) 채워진 공간에서 사실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공간에 혼동과 이야기를 더할 뿐이다. 사실과 허구의 충돌은 작가의 지난 작업에서도 자주 사용되던 서사 방식이다. 


홍장오는 그동안 낯선 공간과 정물들, 이를테면 (그의 지난 개인전 타이틀이기도 한) "우주전경", "우주정물", "외계대사관", "미확인비행존재"들로 새로운 공간을 제시해왔다. 그는 잘 알지 못하는 세계나 공간으로 관객을 데려다 놓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잘 알고 있지 않은' 것을 느끼도록 하였다. 하지만 실상 그 표현 방식이나 구성의 이면에서는 '어디선가 본듯함', '익숙함'의 코드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의 작업에서 이러한 이중적 코드―사실과 허구, 새로움과 익숙함―의 충돌은 작품 구성에 내재된 하나의 축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결국 창출해낸 공간은 우주도 숲도 아니다. 상상의 지점을 어느 단어에 넣어 시작하느냐의 문제일 뿐이고 최종 목적지는 전혀 다른 곳이 될 수 있다. 작가는 상상의 목적지를 선정하는 것에 있어서 몇 가지의 연상 장치만 심어 놓았을 뿐 여정과 마지막 도착지는 감상자 개인의 몫―감상―즐거움이다.

 미술 작품의 감상은 이미지적 즐거움 찾기와 서사(텍스트)적 즐거움 찾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이 두 가지의 범주 안에서 작품 감상의 경로를 탐색하게 된다. 미술이라는 것이 시각을 기본적인 전달수단으로 하기에 시각과 관련된 감상이 주를 이룬다. 이에 비해 '소리'는 미술 감상에 있어서 주요 요소로 부각되지 않는다. 음악이나 음향을 직접적으로 사용한 작업은 소리가 감상의 범주 안으로 들어오지만, 시각 매체만으로 전달하는 작업에서 청각적인 상상은 쉽게 연결되지 않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홍장오 작가의 전시는 시각적, 서사적 코드뿐만 아니라 청각적 요소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정 음악을 틀거나 오브제 자체에서 음향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작품에서 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상상의 소리는 불쾌하지 않은 가벼운 마찰의 소리, 빛에 반응하는 소리이다. 이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공간으로서의 목적지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의 이전 작업에서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소리라는 요소가 부각되는 이유가 새롭게 사용된 투명하고 반사되는 재질 때문인지 이전과 스타일이 변한 전시 제목 때문인지 아니면 두 가지 요소가 함께 가져온 결과인지는 앞으로의 작업 진행을 지켜보며 결론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잠자는 새의 눈물을 나방이 먹는다(Moths drink the tears of sleeping birds)』전시는 홍장오 작가에게 있어서 기존의 서술 방식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상상력을 확장하는 실험적 시도였다. 어휘와 소재의 변화는 전시 코드의 배열을 다르게 변형시켰고 이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와 상황 연출을 만들어냈다. 변화가 가져온 신선함이 상당하기에 성공적인 시작점에 위치했다고 본다.


밝고 어두운 방, 아무것도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공간 옵스큐라에서 결국 유일한 사실은 나방만이 새의 눈물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obscura' shows obscurity but moths know bird's t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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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정물(Cosmic Still Life)

김웅기 (미술 비평)

철학자 후설은 “과학이란 과학 자신이 자신의 기원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진리라고 믿는 의식”이라고 말년에 “유럽학문의 위기”에서 갈파했다. 과학이 탐구의 방식이 아니라 사실과 진리를 보증하는 하나의 체제로 고정되는 상황을 과학에 내재하는 위기로 후설은 본 것이다. 외계인이나 유에프오(UFO)에 대해서도 그 존재의 근거를 우리는 과학의 이름으로 확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유에프오와 관련된 전설과 괴담은 확률적 우연성과 가능성의 추론 속에서 실재한다는 믿음으로 일상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왔다.

홍장오는 지난 몇 년간 “미확인된 비행 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를 확인하려는 시도를 다양한 작품과 전시로 선보였다. 각양각색의 유에프오 형상을 제작해 왔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외계 대사관까지 설치하여 외계인이나 유에프오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지구적 이미지의 반영태인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지구라는 세계에서의 삶을 구조적으로 뛰어 넘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의 바깥은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무한에 대한 갈망과 열망이 외계인을 발견하고 유에프오를 만들어 온 것이다. 이번 전시, “우주정물”에서 아티스트는 이렇게 초월적인 이미지로 제시되는 물체를 매개로 하여 우주의 무한적인 가능성이란 낭만적 사고에 대한 현실적 접근의 단서를 정물적 형태로 보여 주려 한다.

특정한 빛 덩어리가 상상적으로 형성되어 드러난 실재로서 유에프오가 조명 속에서 반짝거리며 정물처럼 갤러리에 치명적으로 놓여 있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비행체의 표상으로서 유에프오가 조명을 받아서 빛을 반사하는 부동의 오브제가 되면서 전시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어 버린다. 동적이어야 하는 오브제가 완벽하게 부동의 오브제가 되어 공간 자체를 평면화 시키는 반면 오브제가 놓여 있는 바닥 자체는 조명 때문에 입체화 되어 오브제를 감싸는 배경처럼 되었다.  도자기로 구어진 유에프오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드러나는 전체적인 상황은 한 점의 그림처럼 표상되어 부동의 오브제들은 정물의 요소가 된다. 갤러리 중심 공간에 빽빽하게 놓여 있는 검고 어두운 유에프오들이 갤러리 벽면에 걸려 있는 사진 속에서 선택적으로 구성되고 배치되어 종교적으로 의인화되어 재현된다. 그런데 유에프오가 알레고리로 드러나는 의미는 외계인이 아니라 지구인이다. 외계인은 어떻게 해도 인간을 닮을 수(anthropomorphic)밖에 없는 것이다.

비상업적인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상업화랑에서 비상업적인 작가 홍장오가 매우 상업적일 수 있는 작품들을 전시한다. 유에프오가 더 없이 인간적으로 친밀한 형상과 사이즈로 전시되고, 그 작품들이 종교적인 후광을 받고 있는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마치 예술품이 종교적 기념품처럼 판매되고 있다. 상업과 비상업의 경계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듯이 좌판을 벌린 인스톨레이션은 전혀 자기 지시적이지 않은 기념품 같은 작품들이 자기 배반적인 갤러리에서 서로 엇갈리면서 그 자체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결된 전시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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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기기묘묘한 대사관( Very Uncanny Embassy)

김웅기(옵시스 아트 대표, 미술 비평)

지하에 있는 좀 컴컴한 갤러리에 들어가자마자 몽골식 텐트, 게르 같은 구조물의 출입구가 불쑥 나와서 좀 당황했다. 오래된 중산층 양옥 거실에나 있을 것 같은 천정 조명등에서 쏟아져 나온 불빛이 온통 번들거리는 은색천으로 둘러싼 벽면에 반사되어 사이키델릭한 분위기가 풍겼고, 그 속에서 나는 잠깐 동안 당황했었다. 기대하고 예상했던 “외계대사관”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외계적 분위기는커녕 텐트 속 인테리어는 지방 여느 관공서 단체장 사무실에나 어울릴법한 유화 초상화가 걸려 있고, 고등학교 동창회에서나 제작한 것 같은 깃발이 책상 양 옆으로 꽂혀 있으며, 책상에는 싸구려 지구본과 분재 화분이 놓여있었다. 외교관 집무실 데스크 위에는 하드커버로 만들어진 의전용 방명록이 놓여 있다. 누구나 그 자리에 앉아서 방명록에 “대사”스럽게 싸인을 하면서 기념 사진을 찍기도 한다. 도대체 외계 대사관에서 뭔가 외계스러운 분위기가 나기는커녕 관광지 포토존 분위기가 났다. 이 대사관 안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결정적으로 뭔가가 어긋나 있는 듯이 보였다.   

외계인은 실재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믿음 속에서만 존재한다. 전설과 괴담, 아니면 과학적 추론이나 확률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귀신을 봤다는 사람들처럼, 외계인이나 그들이 타고 다니는 “미확인 비행 물체( Unidentified Flying Object)”를 봤다는 사람은 넘쳐났다. 그것들의 사진이나 동영상 등이 흔하게 증거로 제시되지만, 외계인은 드라곤처럼 여전히 확인되지 못한 전설 속의 생물체다. 1947 미국 뉴 멕시코 로스웰에 불시착했다는 우주인과 우주선을 확보하여 기밀로 분류했다는 사실(?)은 미국이라는 권위를 빌어서 외계인의 존재를 확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튼이 비밀로 묶인 우주인에 대한 기록물을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면 공개하겠다는 공약까지 발표하는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외계인의 존재는 정말 공공적으로 확인만 안되었을 뿐이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확인 비행 물체를 매우 확정적인 방식으로, 거의 종교적 신념으로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믿음이 없는 나만 유에프오를 보지도, 외계인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외계라는 미지의 장소에서 온 미지의 생물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생물과 유사할 수 있을까? 사실 살아 있는 것 자체는 이미 어떤 이미지를 상기 시킬 수 밖에 없다면, 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생물은 당연히 상상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홍장오는 지난 몇 년간 미지의 세계에서 온 비행 물체와 그 생물체를 대상으로 다양하게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해 왔다. 각종 원반 모양의 다양한 유에프오 조각들을 매우 장식적인 형식으로 전시 하기도 했고, 다양한 외계인의 초상을 매우 익숙한 형태로 그리기도 했으며, 외계인의 언어를 부적처럼 적기도 했다. 외계 대사관은 매우 극단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미지의 생물체를 지나치게 단순하고 익숙한 이미지로 재현시켜 보여주었다. 상상의 대상인 물체와 생물이 매우 익숙하고 확정적인 이미지로 재현되어. 전시 자체가 지나치게 진부하게 구성되어서 전시를 보는 내내 뭔가가 거북하고 어색했다.  전시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외계인이란 매우 가상적인 인간, 상상 속의 인간이다. 아니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할까?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서 온, 전혀 알 수 없는 생명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선이나 외계인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 등 대중매체를 통해서 수많은 다양한 미확인 비행체나 외계인을 우리가 봐왔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인의 형상이 인간을 닮았다는 사실이다. 최근 멕시코에서 공개된 우주인 시신도 팔 다리 얼굴 비례가 좀 다를 뿐 인간처럼 보였다. 아마 인간으로 밝혀졌을 스캔들일 것이다. 미디어 매체나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이라는 것도 얼굴 형태나 몸의 구조가 얼마나 인간과 달라 보여도 해부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형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이미지가 투영된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번도 확인된 적이 없는 미지의 이미지가 인간의 이미지나 인간과 지구 생물체의 변종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이젠 그 이미지 자체를 실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홍장오는 이 친숙한 미지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실체성이 언제나 불편하고 거북했던 모양이다. 가상적인 것의 가상성이 가시화, 실체화 되어 그 가상적 기원이 망각되면서 이 가상적 실체가 이미지의 원본처럼 되는 것이다. 결과와 원인이 홀딱 뒤집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도는 할 포스트(Hal Foster)식으로 말하자면 매우 “기기묘묘( uncanny)”한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홍장오는 꾸준하게 이러한 전도의 결과로 나타난 상황이나 실체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냉소적으로 작업을 해왔다. “I Will Show Me”(2011)는 한 벌의 코트를 안감과 겉감으로 분리시켜 둘을 나란히 독립적으로 쇼윈도우 앞에 배열하고, 조명이 윈도우 바깥으로 향하게 해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보는 관객이 전시의 대상, 즉 작품처럼 보이게 했다. 또 Blackout(2011)이란 작품에서 쇼윈도우 천정에 매달린 불 켜진 램프를 설치했는데, 실상은 그 램프에 불이 켜진 것이 아니고 그 램프를 쇼윈도우 바닥에서 비추는 조명 때문에 생긴 착시라는 것이다. 실체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빛을 통한 착시, 즉 빛이 뿜어 내는 환상 때문에 생긴, 착시가 만들어 내는 허구라는 것이다. “Hideout”(2011)이나 “Nowhere”(2012)에서도 홍장오는 투명한 거미줄이나 그물같은 위장막같은 것을 건물과 건물 사이, 또는 건물 실내 라운지에 설치하였다. 위장이란 본래의 정체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거짓으로 꾸민 장치인데, 그는 숨겨져야 할 위장의 대상을 전시의 대상으로 삼아서   세상 사람들이 다 알도록 드러내었다. 숨겨야 할 의도나 목적을 전면에 노출시켜 그것들을   무효화 시키고, 덩그러니 드러난 구성된 허구를 그 자체로 합목적적으로 보게 해주었다. 폭로된 거짓을 보는 순간이 얼마나 짜릿하면서 민망한 것이고, 또 구성되고 디자인된 가상을 직면하는 것은 또 얼마나 무서우면서 잔인한 것인가!

상상적인 것을 실체화 시키는 것이 미학적이라면 외계인이야말로 매우 적합한 미적 대상이자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볼 수 없는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상상적 재현을 통해서 우리는 예술이 단지 대상물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관점을 거부하고 다른 관점으로 시야를 넓히는 것, 즉 낯설게 하기 그 자체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외계인과 유에프오를 대상으로 일련의 작업을 해 온 홍장오의 작품들을 통해서 외계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구인적인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투사된 인간의 이미지로서 외계인은 유기체적인 시뮬라크르에 다름 아니다. 우상이다. 살아있는 이미지를 창조하려고 하는 인간의 오래된 염원이 현대적으로 재현된 것이다. 투사되어 실체화된 이미지 그 자체가 이미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다만 완성된 작품 속에는 일정한 시점과 일정한 시공간이라는 한정적인 틀은 제거되고, 감각적으로 구성되거나 그려진 어떤 사물의 개념 같은 것만 남게 되는 것이다.

외계인에 대한 우리 시대의 열광적 소비와 숭배는 우리가 우리와 다른 타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처리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다. 숭배되고 소비되고 있는 것은 하나하나의 실체화된 이미지나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들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을 사회적 구조, 시스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 일개 작가가 이러한 시스템을 직면하고 나름대로 자각적으로 대응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홍장오는 그 어려움을 매우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홍장오가 만든 밑바닥부터 숨김없이 드러낸 노골적이고 과잉으로 진부한 그 대사관이 주는 불편하고 어색한 느낌은 그가 전시 속에 숨겨둔 시큰둥하게 내려다 보는 작가의 냉소적인 시선이었다. 무의미할 정도로 뻔한 외계인 이미지와 관공서 사무실 같은 인테리어를 이유 없이 열중해서 열심히 작품으로 제작해서 전시를 해놓고, 작품의 의미나 목적을 탐색하고 알아보려고 열중하는 나같은 관객을 어디선가 내려다 보고 있을 것만 같은 작가의 초월적인 입장이 번들거리는 대사관 벽면에서 스멀스멀 번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홍장오는 사회나 역사에 대해서 타협할 수 밖에 없지만, 절대 순응할 수 없는 예술가적 주관성을 구조나 시스템 위에 세우고 그것에 대해서 매우 낭만적인 태도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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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 Uncanny Embassy

Wong-Kie Kim (Director of Opsis Art gallery/art critic)

No sooner had I entered the gallery located in dark underground than I was flustered to encounter a Mongolian ger-like installation. The lights from the vintage chandelier, which might have been hung in last century’s upper middle class living room, reflecting on the metallic silver fabric was giving a psychedelic atmosphere to the space. I stood there in a blank face, because it was nothing similar to what I expected “Alien Embassy” to look like. On the contrary to such atmosphere, a typical oil portrait painting, which I would have seen in a local government office, were hanging; two high school prop-like flags were standing at both sides of the desk, where a cheap globe and bonsai plant were placed on. Everyone who visited the gallery could sit at the desk and take photos, or leave ‘visitor’s message’ in a hard cover notebook laid on the desk as if they are ambassadors. The “Alien Embassy” was just like a photo zone in a tourist spot instead of having alien-ish atmosphere. There was something extremely falsified about the space.

I believe aliens do not yet exist, but they only exist in people’s belief about them. They exist in legend and myth, scientific inference, and world of probabilities. Regardless of the evidences of UFO and aliens suggested by people who claim to have seen them, the existence of aliens was never been officially certified just as with dragons. In 1947, the ‘fact’ that aliens and a spaceship were landed in Roswell, New Mexico, ‘proved’ the hypothesis to be true under the name of United States. Hillary Clinton, a presidential candidate of Democratic Party of United States, pledged to release secret documents of aliens. In short, people’s belief towards extraterrestrial beings is almost religious, as we see from their belief without any proof.

Can unknown beings from unknown world have resemblance with the creatures we know? For past few years, Jang Oh Hong’s works have been working with the subject of UFO and aliens from unknown world. The works include UFO shaped round sculptures in excessively decorative style, alien portrait paintings, alien charms, and so on. His new show “Outer Space Embassy” showed in Seoul, Korea, us far extremely unimaginable creatures for the outer world to overly familiar and simplified images. In the show, I was distracted by the stereotypical and determined representation of the objects of pure imagination, the UFO and aliens, being uncomfortable and awkward for their oversimplification and clichéd presentation.

Many people feel familiar with aliens, even if they are virtual beings from unknown world. As portrayed in various medias including animation, books, and movies, people’s impression of aliens has always had human like feature. Recent photos of an alien found in Mexico also have anatomical resemblances with human body. In other words, aliens are one of the many things which people project themselves to.  A mystical unknown image that has not been proved yet has become the truth that people rely on. The visualization of the virtual beings forces one to forget the true origin, and the visualized image becomes the truth. In other words, the result and the cause are being reversed.  Jang Oh Hong takes this uncomfortable relationship between familiar yet unknown image and substantiality of the image itself, to create a ‘Hal Foster-ian uncanny’ space.

The artist’s cynical perspective towards situations and substantiality resulted in such inversion is reflected in many of his other works. “I Will Show Me”(2011), an installation piece he produced in 2011, shows a coat, separated into lining and upper, displayed in a show window and a display light facing towards people on the street instead of the coat itself to start a game of constantly switching positon of an artwork and the viewer. Also, in “Blackout”(2011), a lamp installed on the ceiling of a show window seems to have a light on it; the illusion is in fact created by the light source is located on the bottom of the floor, however. Jang Oh Hong often uses transparent camouflage net as in “Hideout”(2011) and “Nowhere”(2012). In those works, he installs the transparent net between buildings, or in interior spaces. As a result, the net, originally intended to hide the objects, instead serves a goal of exposing them. By exposing the purpose of hiding, the original goal disappears, and only the act remains. It is not only embarrassing and exciting to face such disclosure, but also extremely scary to see the highly constructed falsified world.

If art is visualizing virtual beings, aliens can be the best aesthetic object. By representation of unknown world, we realize art does not just exist on the surface of the object, but exists through the process of rejecting familiar perception and broadening the perspective to reach the unfamiliar. Jang Oh Hong’s artworks remind us how ‘earthly’ aliens can be. As a projected image of human beings, aliens are not only an organic simulacre, but also an idol which is visualization of human beings’ old wish to create a living image. A projected and substantialized image itself is already social and historical. At the same time, the limited boundaries, specific time, space, and point of view, is being deleted, only sensation and concept of the object remains.

 Contemporary society’s enthusiastic consumption and worship towards aliens reflects how we perceive and treat the others. What is being consumed and worshiped are not individual objects but the social structure, the system. As an ordinary human being, it is not easy to face and correspond to such system. However, Jang Oh Hong responds to such system in a very ironic but effective way. The reason I felt uncomfortable and awkward in the stale embassy with bluntness and excessiveness is because of the artist’s cold and apathetic perspective hidden beneath it. After working hard intently to make a space, too obvious and almost meaningless presentation of an alien image and interior space reminding a public office, the artist is at the same time looking down on the viewers in including me who are trying their best to figure out the meaning and the purpose of the work. His cynical eyes and transcendental position was crawling and spreading out from the glossy walls of the embassy. Jang Oh Hong builds artistic subjectivity that both compromising and inadaptable to the society and history on the structure and the system, and corresponds with it in a very romantic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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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모 도형에서 발견한 판타지와 자기풍자 

반이정 (미술평론가)

다종다양한 만인의 취향을 도형 하나로 단순하게 흡수하는 간결한 디자인. 마름모형, 이등변 삼각형, 혹은 역삼각형이나 다이아몬드형. 이와 유사한 그 어떤 도형이어도 주어진 조건 속에서 미확인비행물체인 UFO의 판타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마름모나 여하한 삼각형들이 그 자체로 발광하는 판타지를 품은 도형일리 없다. 이 도형들이 UFO로 인식될 때, 단순한 도형 이상의 저력을 사람들이 발견한다는 게 바른 설명일 게다. 이 매혹적인 비행물체 수 십대, 이른바 UFO편대를 목격한 적이 있다. 1984년 어떤 밤. 그날 밤의 목격을 그림과 짧은 글로 기록한 종이가 있었는데, 후일 관리 소홀로 분실했다. 목격담을 기록한 종이의 분실은, UFO처럼 초자연현상을 향한 청소년기 특유의 호기심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성장하면서 내가 1984년 어느 날 밤하늘에서 본 것이 UFO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날 밤 본 것은 아마 이동 중인 새의 무리거나, 바람에 날려 창공을 비행하는 큰 비닐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내가 본 것이 UFO편대라고 확신했지만, 10년이 흐른 후 UFO가 아닐 거라고 거의 확신한다.

인구에 흔히 회자되는 이 매혹적인 도형을 틈틈이 출몰시키는 홍장오의 작업 연보를 살피다가, 1984년 나의 목격 추억이 떠올랐다. UFO를 특집기사로 크게 다룬 청소년 잡지들을 유년시절 많이 접한, 미확인비행물체에 관심을 쏟은 청소년기를 보낸, 그래서 이따금 별이 아니라 UFO를 우연히 목격하고 싶어서 창공을 올려보던 어떤 소년의 집착이 밤하늘의 어떤 물체를 UFO로 착시하게 만들었으리라 추정한다.

전 세계적인 UFO현상은 아마 집단적 착시거나 의도된 사실 조작일 공산이 높다. UFO를 순수하게 믿었던 나의 과거사를 일깨울 단서를 이제 갤러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UFO의 이름과 형상을 차용해서 ‘미확인 된 끝내주게 멋진 물체’로 변형한 홍장오의 UFO(Unidentified Fabulous Object) 연작은 세간의 UFO 현상을 제도 미술계의 현상으로 치환한 작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외계에서 온 (아마도 초능력을 지닌) 외계인에 대한 경외감, 발광하는 비행물체에 대한 감각적인 호기심, 미지의 세계를 향한 선망, 이 모든 판타지는 UFO 촬영 사진으로 보도되는 일련의 진짜처럼 조작한 가짜 사진들의 구체성으로 근거를 얻는다. UFO 목격담 내지 촬영 사진의 절대 다수 혹은 전부가 의도된 조작임에도, 이 날조된 신화를 둘러싼 대중적 믿음과 관심은 지대하고 흔들림이 없다.

빈약한 근거와 불분명한 출처에도 불구하고, 번쩍이는 외관에 대중이 호도되는 일은 실로 많다. 명품 가방을 베낀 불법 위조품이 대로변에서 팔리는 현상, 부정부패를 일삼아서 언론의 지탄을 받는 성직자인데도 천국을 약속했다는 이유로 그의 초대형교회에 신도들이 몰리는 믿기 어려운 사회상, 미학적 완성도가 의심되지만 지명도 때문에 미술계에서 깊은 신망을 얻는 어떤 미술가들 등도 그렇다. 이런 믿음은 제의의 형태로 반복된다. 홍장오가 2014년 신작에서 UFO코드를 동양 부적으로 재현한 작품은 신비주의나 예술이나 나아가 의사과학이 모두 근거 없는 제의에 의존해서 존재함을 드러내려 한 것이리라. 비단 UFO 연작에 국한하지 않아도 홍장오의 작업 연보는, 악의 없는 집단 착시에 집중해서 그 착시가 만드는 허구적 현상을 다루고 있다.

착시에 대한 홍장오의 관심은 2014년 말 ‘cosmic~’ 연작이 계승하는데, 특히 <cosmic landscape>가 그 백미이다. 이 작품은 어떤 작가의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생된 파편들을 재활용한 입체설치물이다. 완성품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에 어떤 미적 의도가 담겼을 리 만무하지만, 홍장오는 그 무용한 파편을 가공해서 ‘의도를 담은 예술품’처럼 만들어 놨다. 크롬 도금으로 매끄럽고 반짝이는 표면은 미적 가치를 담보하는 것 같으며, 완성품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들의 윤곽이 하나 같이 이런저런 형상들을 의도적으로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cosmic landscape>라는 이름으로 나열된 7개의 파편 가운데 손쉽게 연상할 수 있는 파편도 있다. 가령 중절모에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형상을 발견한 어린왕자의 상상력을 재현한 파편이 그것이다. 또 인물의 측면을 닮거나, 새의 한쪽 날개를 재현한 것 같은 파편들도 보인다. 어린왕자의 발견에서 보듯, 완결체로 닫힌 해석이 아니라, 관객에게 무한히 열린 해석의 대상으로 착시를 일으키는 파편들을 던져놓은 점에서, 홍장오의 <cosmic landscape>는 뒤샹의 ‘발견된 사물’의 연장선에 있고, 때때로 아무거나 예술로 둔갑시키는 현대미술의 생리에 대한 자기풍자이기도 하다.

예술의 생리에 대한 자기풍자와 미적 유희는 홍장오의 작업 연보 속에 자주 등장했다. 2014년 말에 선보인 신작에도 포함되어 있다. 우연적 발견이 초래하는 미적 유희를 이번 개인전 전시실 한 구석에 마련된 ‘아트샵’에서 반복하고 있다. 스스로를 상품화한 이 자기풍자적 설치공간은 세상에서 어떤 사물이 미술로서 유통될 때 취하는 공식을 차용한 것이다. 그 결과 간이 아트샵을 채운 미술엽서 미술포스터 실크스크린 등은 모두 복제될 수 있는 결과물인데, 예술을 만드는 손쉬운 공정을 사용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예술로 인정하는 대중의 공모를 아트샵으로 재현한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가 예술이 되는 현상의 배후에는 복잡하기보다 단순한 논리가, 필연보다는 우연적인 사건이 놓일 때가 많으며, 정교한 논리보다 집단 착각이 작용할 때가 압도적으로 많다.

대상의 자기모순이나, 감동주의를 전제한 예술 존재론에 관해 홍장오는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조명의 자체 발광 기능을 무력화시키고도 마치 자체 발광하는 조명인양 연출한 <Blackout>(2010)이나, 무언가를 숨기는 위장(僞裝)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되 위장 자체는 투명하게 드러낸 <위장>(2007~) 연작 등이 대상의 자기모순을 다룬 작업일 테다. 대상을 둘러싼 고정적인 가치를 무력화시키는 이 같은 미적 태도의 계보는 더 멀리까지 간다. 2001년 <탈색>연작이 그 시조일 텐데, 그 연작 중에서 반 고흐의 회화 <해바라기>를 투명한 유리로 만든 입체조형물로 재구성한 작품이 있다. 화사한 색감과 붓질 때문에 유독 모더니즘 예술의 전설로 격상되는 반 고흐를 둘러싼 세간의 맹신에 대한 동시대 미술가의 냉정한 화답 같기도 하다.

 이처럼 때때로 황당무계한 예술 존재론은 단순한 마름모 도형을 향한 집단적 열광이 UFO 판타지를 만드는 현상과도 닮아 있다. 홍장오는 집단 열광과 맹신을 간단히 수렴시킬 디자인으로 마름모 도형을 택한 것 같다. 그의 마름모 도형은 UFO, Lucy, 때로는 Stealth라는 이름으로 작품 속에 출연한다. 그리고 마름모 도형이 수렴시킨 그의 미학은 “(예술)이 존재하는 공식은 때때로 UFO를 향한 집단적 열광과 닮아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주어가 들어가는 괄호( )의 자리에 ‘신(神)’을 넣어도 ‘사랑’을 넣어도 뜻은 자주 통한다.